Pages

Tuesday, July 14, 2020

[종교 칼럼] 키 작은 삭개오와 예수 (눅 19:1-10) - 미주 중앙일보

kuncikn.blogspot.com
삭개오는 키가 작았다. 키가 작다는 것이 사회적인 편견과 조롱의 대상이 될 수도 있지만, 그럴 것이라고 여기는 시각자체도 차별적이고 폭력적이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삭개오가 극복해야할 난관으로 등장한다. 자신 보다 키가 큰 무리 속에서 예수를 결코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막강한 권력과 부를 누리는 세리장이라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삭개오는 키가 작아서 나무위에 직접 올랐다.

여리고는 당시에 발삼나무의 주 산지였을 뿐만 아니라 향유가 그 곳을 통과하는 곳이기 때문에 통관세를 받는 큰 세관이 있었고 삭개오가 그 세관의 세리장이었다면 자신의 말을 충성스럽게 따르는 부하들이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삭개오는 다른 사람을 보내어 점잖고 격식 있게 예수를 초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삭개오는 성급하게 자신이 직접 나무에 올랐다. 예수께서 자신의 집에 머무르겠다고 하자 급히 나무에서 내려와 즐거워하면서 예수를 영접한다(눅19:7-6). 무엇이 삭개오를 이렇게 성급하고 들뜨게 했을까?

삭개오를 만난 예수도 또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성급하다. 삭개오에게 “속히” 나무에서 내려오라고 하시면서(눅19:5), “오늘” 삭개오의 집에 머무르겠다고 하셨고, 삭개오가 자신의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고 하자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선포했다. 삭개오의 말 가운데 재산을 “주고” “팔겠다”고 한 두 동사는 모두 현재형이다. 따라서 삭개오가 그런 행동을 이미 진행하고 있었을 수도 있고, 예수께서는 이미 회심한 삭개오를 그냥 확정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7절에서 뭇 사람이 예수가 “죄인” 삭개오의 집에 들어갔다고 수군거리는 것으로 봐서, 삭개오는 적어도 주위사람들에게 여전히 죄인으로 인식되고 있었고, 따라서 “주다”와 “팔다”라는 두 동사는 미래에 일어날 일을 성급하게 현재형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미래적 현재형). 죄인 삭개오는 성급한 약속만으로도 구원에 이를 수 있을까? 구원이란 오늘 갑작스럽게 주어지는 것일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눅13:24) 그 준엄한 예수는 키 작은 삭개오 앞에서 왜 이렇게 작아졌을까?

삭개오는 예수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고 싶은 열망이 있었다(눅19:3). 예수를 만나는 장면에서도 예수께서 지나갈 길목의 나무에 미리 올라가 예수를 기다리고 있었다(눅19:4). 비록 나무에 오르는 행위 자체는 성급하고 즉각적인 것이지만 그 행동이면에 숨겨져 있는 긴 세월의 축적을 짐작해볼 수도 있다. 악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하는 자가 자신의 잘못을 외부적으로 인정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내면 속에 서서히 차오르는 죄의식, 번민, 수치 등이 오랜 세월 삭개오를 괴롭혔을 수 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예수도 그렇게도 성급했을까? 비록 그 구체적인 내용은 달라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도 삭개오의 경우처럼 오랜 기다림이 성급함의 배경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일시에 동시적으로 하늘 위에서 모두 구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신은 유치한 인간이 상상하곤 하는, 일방적이고 전제적(專制的)인, 따라서 “생명없는” 신일 뿐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살아있는 인격적인 하나님이기 때문에 “인간과 함께” 역사를 만들어 간다. 예수의 성급함은 고통 속에 살아가는 인간과 오랫동안 함께해온 하나님의 안타까운 세월의 축적이다.

이 살아있는 예수께서 삭개오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다음 칼럼에서 다루겠다.

Let's block ads! (Why?)




July 14, 2020 at 04:34PM
https://ift.tt/2CbzNM3

[종교 칼럼] 키 작은 삭개오와 예수 (눅 19:1-10) - 미주 중앙일보

https://ift.tt/3fjqVlg

No comments:

Post a Comment